황건적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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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전쟁 정보
|분쟁=황건적의 난
|전체=[[후한]] 말기
|그림=Three Brothers during the Yellow Turban Rebellion.jpg
|그림=
|설명=
|날짜=[[184년]]
|장소=[[유주 (중국)|유주]], [[청주 (중국)|청주]], [[영천시|영천]], [[곡양]], [[완성]]
|결과=황건의 난 진압, 그러나 [[후한]]의 쇠퇴,
|교전국1=한나라 관군
|교전국2=[[황건적]]
|지휘관1=[[하진 (후한)|하진]]<br /> [[노식]] <br />[[황보숭]] <br /> [[주준]] <br /> [[동탁]] <br /> [[원소]] <br /> [[조조]] <br /> [[손견]] <br /> [[유비도겸]] <br /> [[포신]]
|지휘관2=[[장각]] <br /> [[장량 (후한)|장량]] <br /> [[장보 (후한)|장보]] <br /> [[장만성]]
|병력1=7만 <br />
|병력2=36만
|사상자1=
|사상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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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상자 후한말}}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은 중국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 {{llang|en|Yellow Turban Rebellion, Yellow Scarves Rebellion}})은 중국 [[후한]] 말기 황주하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이후 중국은 군웅이 할거하며 결과적으로 황건적의 난은 [[삼국시대]]의 개막의 큰 원인이 되었으며 앞으로 300년간의 긴 분열기인 [[위진남북조]]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 배경 ==
외척이나 환관의[[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 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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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 (후한)|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 (중국)|강동]]의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후한)|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 (중국)|유주]]의 [[탁현]]에서는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삼국지)|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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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정원지]]† <br /> [[등무]]†
|병력1=유비 500명
|병력2=5만 명50,000명
|사상자1=
|사상자2=
}}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유주성으로 가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 (후한)|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 (삼국지)|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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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184년]]
|장소=[[후한]] [[청주 (중국)|청주]], [[유주 (중국)|유주]]
|결과=[[황건군]]의황건군의 패배
|교전국1=[[유언 (삼국지)|유언]]([[후한]]) <br /> [[유비]]([[촉한]]) <br /> [[공경]]
|교전국2=[[황건적]]
|지휘관1=[[유비]] <br /> [[공경]] <br /> [[추정 (후한)|추정]] <br /> [[관우]] <br /> [[장비 (삼국지)|장비]]
|지휘관2=불명
|병력1=유비 500명 <br /> 추정 5000명5,000명 <br /> 총병력 5500명5,500명
|병력2=불명
|사상자1=
|사상자2=
}}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중국)|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은 교위 [[추정 (후한)|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중국)|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은 교위 [[추정 (후한)|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
 
=== 영천 전투 ===
{{전쟁 정보
줄 106 ⟶ 111:
|병력2
|사상자1=불명
|사상자2=1만 명10,000명 전사
}}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이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 (후한)|장량]]과 [[장보 (후한)|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 (후한)|장량]]과 [[장보 (후한)|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만 명의10,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팽탈의 황건군은 다시 격파했고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한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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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날짜=[[184년]]
|장소=[[후한]] [[형주기주]] 광종
|결과=[[유비]]의 승리
|교전국1=[[유비]] <br /> [[장온 (후한)|장온]] <br /> [[동탁]]
|교전국2=[[황건적]]
|지휘관1=[[유비]]<br /> [[동탁]] <br /> [[장온 (후한)|장온]] <br /> [[손견]] <br /> [[장비 (삼국지)|장비]] <br /> [[관우]]
|지휘관2=[[장각]]
|병력1=유비 500명
줄 133 ⟶ 139:
|사상자2=
}}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
 
=== 곡양 전투 ===
{{전쟁 정보
줄 173 ⟶ 181:
|교전국2=[[황건적]]
|지휘관1=[[유비]]<br />[[주준]] <br /> [[장비 (삼국지)|장비]] <br /> [[관우]]
|지휘관2=[[장보 (황건적후한)|장보]]† <br /> [[고승 (황건적)|고승]]† <br /> [[엄정 (황전적)|엄정]]
|병력1=유비 500명
|병력2=장보 9만
|사상자1=
|사상자2=[[장보 (황건적후한)|장보]], [[고승 (황건적)|고승]] 사망, [[엄정 (황건적)|엄정]] 항복
}}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 (후한)|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 (삼국지)|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 (후한)|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줄 183 ⟶ 191: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황주하
}}
=== 완성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완성 전투
줄 202 ⟶ 211:
|사상자2=
}}
황건적의 난 주요 인물로 생김새는 주재기자 황주하를 닮았고 또한 강함으로는 이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어지는 전쟁 속 전우들을 구해내고 황건적의 난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책과 비롯된 곳에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우들을 구해내고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확실시 된다
남양 지역에서는 3월 [[장만성]]이 황건군을 이끌고 남양을 공격해 남양 태수 [[저공]]을 죽이고 이에 6월 새로 임명된 남양 태수 [[진힐]]이 장만성을 죽였으나 다시 [[손중]], [[조홍 (후한)|조홍]], [[한충 (후한)|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와 [[주준]]은 남양 태수 [[진힐]], 형주 자사 [[서구 (삼국지)|서구]]와 합류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의 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과 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르고 손견이 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남양 태수 진힐에게 죽고 10월 마지막 남은 [[손하]]의 황건군마저 괴멸당하면서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
=== 황건적의황주하의 재봉기 ===
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 성산시성 (산서성)|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 (후한)|이각]]과 [[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과 연주 자사 [[유대 (연주자사)|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줄 215 ⟶ 222:
 
== 같이 보기 ==
{{위키공용분류}}황주하
* [[황건적]]
* [[장각]]
줄 226 ⟶ 234:
{{전거 통제}}
 
[[분류:황주하|주요 인물]]
[[분류: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사건]]
[[분류: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줄 240 ⟶ 249:
[[분류:황건적| ]]
[[분류:묵시사상]]
[[분류:2세기 반란]]
[[분류:3세기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