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씨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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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설에서는 『좌전』의 저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노(魯)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이라고 하였으나, 전설로서 분명한 것은 아니다. 또한 『사기』(史記)에 『좌씨춘추』(左氏春秋)라는 서적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현행 『춘추좌씨전』과 같은 책인가에 대해서도 이설이 존재한다.<ref>사기(史記) 권14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제2에「노나라의 군자 좌구명은 제자들이 각각 오류를 범하며, 제각기 주관에 집착하여 그 진의를 잃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자의 기록에 연유하여 그 구절을 상세하게 논술하여 좌씨춘추를 지었다」(魯君子左丘明懼弟子人人異端,各安其意,失其真,故因孔子史記具論其語,成左氏春秋)라고 하였다.</ref>
 
일설에는 옛날부터 있었던 역사서를 [[전한]] 말기의 사상가 [[유흠]](劉歆)이 여러 차례로 춘추좌씨전이라 하였고, 저자는 좌구명이라 선전하였고, 스스로 황제로 오른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하였을때찬탈하였을 때 그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라는 신공양학파 학자 [[캉유웨이]] 등이 여러가지 이설이 있다고 하지만, 이 주장도 입증이 된 주장이 아니다.
 
유흠은 『좌전』을 좋아하여 학관(学官)을 세우고자 애썼다.<ref>劉歆伝:漢書卷三十六 楚元王傳 第六 向少子 歆 ウィキソースのロゴ 中国語版ウィキソースに本記事に関連した原文があります:漢書/卷036</ref> 후한 시대에는 금문(今文) 좌전과 고문(古文) 좌전의 대립으로 비판받으면서도 많은 학자들이 『좌전』을 배우게 되었다. 훗날 이에 대해 [[캉유웨이]](康有為) 등 청대 후기의 공양학자(公羊学者)들은 『춘추좌씨전』을 유흠의 위작이라고 하였으며 그들이 옹립한 [[왕망]](王莽)이 한 왕조를 이어받았다는 근거로 내세우려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