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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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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rene (토론 | 기여)님의 2008년 11월 30일 (일) 01:22 판 (→‎번의 역사)

사가라 번(相良藩)은 도토미노쿠니 하이바라 군 사가라(현재의 시즈오카 현 마키노하라 시 사가라) 주변에 존재했던 에도 시대의 번이다. 번청은 사가라 신야(사가라 성터)

번의 역사

호에이 7년(1710년), 혼다 다다하루가 1만 5000고쿠의 영주로 임명받고 번을 세웠다. 엔쿄 3년(1746년), 제3대 번주· 혼다 다다유키무쓰노쿠니 이즈미 번으로 이봉되고 대신 이타쿠라 가쓰키요가 1만 5000고쿠의 번주로 취임했다. 간엔 1년(1748년) 11월, 가쓰키요는 고쿠다카가 2만석으로 증가되어 성주격이 되었지만 다음해 우에노쿠니 안나카 번으로 영지가 옮겨졌다. 대신 미카와노쿠니 고로모 번 출신의 혼다 다다나카가 1만고쿠의 번주가 되었지만, 호레키 8년(1758년) 미노노쿠니 야와타 번을 다스리던 가나모리 가문이 가혹한 통치 및 내분으로 가이에키(改易, 영지 몰수)를 당하자, 인척인 다다나가까지 연좌로 가이에키되었다.

후임으로 제9대 쇼군·도쿠가와 이에시게 아래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다누마 오키쓰구가 1만고쿠를 받고 번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 아래에서 호레키 12년(1762년) 2월 15일에는 5000고쿠, 메이와 4년(1767년) 7월 1일에는 소바요닌으로 영전하면서 5000고쿠가 증가된 2만고쿠다이묘이자 성주격이 되어 사가라 성의 축조를 허락받게 된다.

게다가 안에이 1년 (1772년) 로주가 되면서 「다누마 시대」라 불릴 만큼 더할나위 없는 영화를 누려 영지가 5만 7000고쿠까지 증가되었다. 번정에 있어서도 식산흥업 정책을 써 성시(城市)의 개조, 다누마 가도의 신설을 행하는 등의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덴메이 6년(1786년), 쇼군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실각,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강제은거 당하고 사가라 번은 폐번이 된다. 다만, 오키쓰구의 손자· 오키아키가 1만 고쿠무쓰 시모무라 번으로 이봉하면서 다누마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이 허락되었다. 분세 6년(1823년)7월 8일,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허락을 받아 오키쓰구의 차남·다누마 오키마사가 1만 고쿠의 사가라 번주로 복귀하였다. 메이지 1년(1868년), 제3대 번주 다누마 오키타카가즈사노쿠니 고쿠보 번으로 옮겨지면서 폐번되었다.